효령
행사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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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李목) [1572(선조5)~1646(인조24)]

자는 문백(文伯), 호는 송교(松郊) 또는 송휴(松畦), 시호는 충정(忠正). 대군의 7대손이며 장제부정(長堤副正)의 현손이고 증 좌찬성 신성(愼誠)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원주변씨로 사과 극성(克誠)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적산조씨로 생원 경(瓊)의 딸과 장수황씨 현감 우(佑)의 딸과 고령신씨 득준(得濬)의 딸이다. 1603년(선조36) 성균관 유생이 되고 1611년(광해군3) 동료 유생들과 함께 성혼(成渾)의 신원(伸寃)을 상소하여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케 했다. 1611년(광해군3)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사재감 직장, 교검(校檢)을 거쳐 1615년(광해군7)에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대북(大北)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인조반정 후에 정언·수찬·교리·이조좌랑을 역임했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왕을 호종하고 이귀(李貴)의 패전 책임을 탄핵하였다. 이어 사인·집의·예조와 이조의 참의를 거쳐 1626년 대사간에 승진하고 다음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임금을 호종했다. 1631년(인조9) 부제학에 전직, 참관을 거쳐 1636(인조14) 형조참판이 되고, 이 해 병자호란에 협수사(協守使)로 남한산성을 수비하면서 청나라와의 화의(和議)에 적극 반대했다. 환도 후에 윤황(尹煌) 등이 척화한 일로 유배되자 글을 올려 자핵(自劾)하고 물러났다. 학문이 깊고 지조가 있으며 유학자 김집(金集)과 서로 친하여 모든 일을 의논해서 하였고, 1638년 대사헌·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도승지를 거쳐 1643년(인조21) 부제학으로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을 겸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1636년(인조14) 대군7대손 호조판서 명(명)과 외예손들이 재력을 모아 위토를 마련하고 위토 경작인 20여 가구를 두어 묘소를 수호케 하였다. 유고로는 <송교유고>가 있고, 사단법인 청권사가 간행한 <국역 송교유고 상·하>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 보개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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