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
행사 일정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승(李承) [1552(명종7)~1598(선조31)]

자는 선술(善述), 호는 청휘당(晴暉堂), 대군의 6대손으로 증 호참 희운(希雲)의 아들이다. 성품이 순수하고 지혜가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도 지극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洸)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경서>와 성리학을 배웠고, 신당촌(新塘村) 동산 아래에 고가(古家)를 개축하여 당호(堂號)를 ‘청휘당’이라 하고 동강(東崗) 김우옹(金宇?)·한강(寒岡) 정구(鄭逑) 등과 교우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588년(선조21)에 서애(西涯) 류성용(柳成龍)의 천거로 선공감역(膳工監役)에 제수되었으나 학문에 뜻을 두고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 해 여름 한강 정구·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등과 함께 창원 월영대 등 명승지를 유람하고 오는 길에 현풍(玄風)·송림(松林)에 들러 연꽃을 감상하면서 인근의 김면(金沔)·박황(朴惶)·이홍우(李弘宇)·李弘量) 등과 함께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시를 지어 읊었다. 이 시가 오늘에 전하고 있고 이를 ‘낙강7현(洛江七賢)’ 이라 전한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3남 지방이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선조대왕이 파천길에 오르자 서책을 덮어놓고 의병을 모아 김면이 주도하는 창의군(倡義軍)과 합세하여 거창·고령·금산·성주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적선 2척을 나포하여 적들이 민가에서 강탈한 재물을 다시 찾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9월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관군과 합세하여 30여 차례의 격전을 벌여 지례·안음·함양 등지를 수복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1595년(선조28) 계비(繼?) 상을 입어 집상을 하는 동안에도 군량미를 모아 군영에 보냈다. 1598년(선조30) 정유재란에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부름을 받고 가던 중에 청주 말리에 이르러 과로로 병을 얻어 순직했다. 장원서 별제, 뒤에 성균관 제주에 증직되고 신계서원(新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 봉암산 말록 임좌이다. 유저로는 <청휘당실기> 1책이 전해오고 있다.

게시글이 어떠셨나요?



다른 이모티콘을 한번 더 클릭하시면 수정됩니다.

화살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