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
행사 일정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번(이번) [1575(선조8)~1633(인조11)]

자는 거원(巨源), 호는 낙강(洛江), 사호(賜號)는 낙주재(洛洲齋). 대군의 7대손이며 송산도정의 현손이고 증 호조참판 사제(思齊)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청주한씨로 사과 용(鏞)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문화류씨로 군자감 주부 개(愷)의 딸과 증 정부인 재령이씨로 증 판결사 대영(大榮)의 딸이다. 성품이 순후하고 영민하였으며 12세에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에게 수학하였고 뒤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평소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1592년(선조25) 예빈시(禮賓寺)를 참봉으로 복무시는 약관 17세로 임진왜란을 맞아 류성용의 천거로 선조대왕의 호종관을 하였다. 1605년(선조38)에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됨과 동시에 부사과에 제수됐다. 이어 사헌부 감찰·연산현감을 지내고 1613년(광해군5) 봉화현감으로 나갔다가 정국이 혼란함을 개탄하고 사직했다. 1618년(광해군10) 인목대비가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밤을 틈타 의류와 식량을 공급하였고, 연흥부부인(延興府夫人) 노씨(인목대비의 생모로 공과는 이종간이 됨)가 제주도로 귀양갈 때와 반정 후 돌아올 때 함께 수행하였다. 반정 후 정사훈(靖社勳) 책록을 사양하고 밀양으로 낙향, 1624년(인조2) 홍문관 직제학으로 제수되었으나 이 또한 사양하고 낙동강가에 정자를 세웠다. 인조대왕은 이를 알고 ‘낙주재(洛洲齋)’란 사호를 겸한 재호(齋號)와 ‘금지옥엽(金枝玉葉)’이란 네 자의 어필(御筆)과 비단병풍·옥벼루 등을 하사했다. 1633년(인조11)에 별세하자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제문이 내려졌으며 부조묘(不?廟) 경덕사(景德祠)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남 김해시 상동면 묵방촌 후록 자좌이다. 승지 이승보(李承輔)가 짓고 직각(直閣) 김시윤(金始潤)이 쓴 신도비가 있다.

게시글이 어떠셨나요?



다른 이모티콘을 한번 더 클릭하시면 수정됩니다.
반응 전체보기 참여자 보기

화살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