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
행사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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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축(李起築) [1589(선조22)~1645(인조23)]

초명은 정(日丁), 자는 희열(希說), 시호는 양의(襄毅). 대군의 7대손으로 충청도 수군절도사 증 순충보조공신 병조판서 완원군 경유(慶裕)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충좌위(忠佐衛) 부사과(副司果)가 되고, 완풍군 서(曙)와 종형제로 서로 뜻이 맞아 항상 가까이에서 지냈다. 1622년(광해군14) 완풍군이 장단부사로 갈 적에 역시 따라가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개탄하고 반정에 참여하였다. 능양군(綾陽君:인조대왕)의 잠저(潛邸)에 왕래하면서 품정(稟定)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623년(인조1) 장단에서 군사를 일으켜 도성으로 들어올 때 선봉장이 되었다. 인조대왕은 군기(軍期)가 늦으므로 친히 나가 연서역에 이르러 상봉하자 공은 말에서 내려 노좌(路左)에서 절하고 장단군을 거느리고 온 실상을 아뢰었다. 인조대왕은 즉시 어포(御袍)를 벗어 입히었다. 반정 후에 정사공신 3등이 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해졌다. 임금은 말하길 “내가 기축과 더불어 어릴 적에 서로 놀아 아명을 익히 불렀으니 이제 이 녹훈(錄勳)에는 아명으로 기록케 하라.” 하고 수일 후에 친히 이름을 ‘기축(起築)’으로 써서 하사했다. 소자(小字)가 기축(己丑)이어서 글자의 음이 서로 같으므로 고쳐 쓴 것이다. 녹훈 후에 통정에 올라 금군장·호위별장·오위장·금문천총별장 등을 역임하고, 1629년(인조7)에 위원군수, 1633년(인조11) 삭주부사 등 외직을 지내기도 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에 금군장으로 대가(大駕)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어영별장이 되어 남문을 지켰다. 이 해 12월 21일에 자원 출정하여 적괴(敵魁) 10여 급을 베어 가지고 돌아와 성안의 중심(衆心)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다음 해 1637년(인조15) 정월 19일 밤에 적군이 동성으로 쳐들어오자 성이 거의 함락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어가를 모시고 장경사(長慶寺)에 있으면서 사력을 다하여 정신독전(挺身督戰) 끝에 마침내 적을 물리쳐 인조대왕은 가선(嘉善)으로 가자를 내렸다. 강화(講和)한 뒤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 심양으로 갈 때 인조대왕의 특별한 분부로 배종(陪從)하였다가 3년 뒤에 병을 이유로 먼저 환국하였다. 1642년(인조20) 장단부사로 제수되었으나 모친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1645년(인조23) 6월 6일 송산병사(松山丙舍)에서 별세하였다. 입관 전에 임금은 한성판윤을 제수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송산에 있다. 부조묘는 경기도 하남시 상사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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