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
행사 일정

이구(李?) [1613(광해군5)~1654(효종5)]

자는 대방(大方), 호는 활재(活齋), 대군의 8대손으로 공조정랑 광흡(光洽)의 아들이다. 총명하고 단정하여 유학자의 기품과 도량이 있었다. 스승에게 <소학(小學)>을 베울 때 문리(文理)에 쉽게 통달하여 <경전> 및 <사기(史記)>를 쉽게 깨달았고 문장과 필력이 뛰어났으며 구습을 따르지 않았다. 장성하여 설문청의 글 중에서 “유유향상공부, 문장특토저(儒有向上工夫 文章特土?:선비가 도학공부가 있으면 문장은 하찮은 물건과 같다)라”는 말에 개연히 심중에 깨닫고, 성현의 도에 전심하였다. 부모님을 위하여 부득이 공령(功令)에 나아가 향시에 장원이 2번, 별시에 합격하기를 2번 하였으나, 1636년(인조14)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뒤로는 “종국(宗國)의 수치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여 과거보기를 단념하고 가족을 거느리고 조령을 넘어 문경 땅 산양마을에서 생활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특히 성리학에 잠심(潛心)하여 퇴계의 이기설을 주장하고 율곡의 기발설을 반박하였다. 인조대왕이 구언(求言)에 응한 10조소(十條疏)에 편사미거(偏私未去)·기욕미절(嗜慾未絶)·성의미진(誠意未盡)·지은미추(至恩未推)·저위보양(儲位輔養)·대신선임(大臣選任)·명분부정(名分不正)·예의불상(禮依不尙)·붕당불거(朋黨不去)·기미불심(機微不審) 등으로 직언하였다. 또 효종대왕에게 우계와 율곡의 승무(陞?: 문묘 배향)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그의 정당한 학술적 논리와 역사적 설명을 개진하였다. 문경 근암서원(近?書院)에 배향되고 <활재집(活齋集)> 7권과 부록 1권이 전한다. 사당은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에 있다. 문집판각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어 도비로 건축한 보장각에 보존되고 있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장연면 송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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